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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8.11.16 금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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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바로보기/해방 후 요직 오른 친일관료 정운갑

대선이 다가오면서 이른 바 ‘철새 정치인’들이 여기 저기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옥석을 구별하고 까마귀와 백로를 가려내기에 수월한 것 말고는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불쾌할 뿐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런 질 낮은 정치인들이 많은지 한 인물을 통해서 살펴보자.

DJP연합이 아직 깨지기 전, 민주당과 자민련이 장관직을 나눠 갖던 때 새로 입각한 정치인 출신 장관 프로필이다.

‘정우택 해양수산부장관-자민련내 대표적인 경제통이다. 행정고시 합격 후 체신부를 거쳐 경제기획원 법무담당관을 끝으로 관계를 떠났다. (중략) 이번 발탁에는 민주당 신파 출신의 부친 정운갑 전 신민당 총재직무대행과 김대중 대통령간의 인연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문화일보 2001년 3월 26일치)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장관이 되었다고 하여, 부자 장관으로 이들이 이야기가 회자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정운갑은 누구인가? 1913년 생으로 충북 진천 출신인 정운갑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 법문학부를 1938년에 졸업, 1943년 일제 시기 고위 공직자 선발 시험인 고등문과시험(이하 고문)에 합격한 전형적인 직업관료출신이다.

자칭 이 사회의 주류라는 사람들의 입을 빌리자면 정운갑은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일제하 경력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이 빨리 패전하여 그가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고문 출신자들은 구한말 관료였다가 한일합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총독부 관료가 된 경우나 면서기처럼 총독부의 말단 관리와 달리 철저하게 일제에 충성하기로 결심하고 그야말로 프로의 길로 나선 확신범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부터 시행된 고문시험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이 안정화되면서 친일 엘리트관료의 등용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정운갑은 만 30세의 나이에 그의 인생의 목표를 일본의 관료로 정한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그대로 대한민국의 관료가 된 일제 관료 출신들은 자신들을 pro-Jap(일본 협력자)이 아닌 pro-Job(직업 관료)이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하였다.(이 말은 조병옥 미군정 경무국장의 말로 해방 정국에서 좌익 색출에 앞장섰다.)

정운갑 역시 해방 후, 일제관료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아래서 총무처장, 내무차관, 농림부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달리 관운이 많은 그를 두고 주변에서 ‘정(政)운갑’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이후 새로 만들어진 신민당에 윤보선계로 참여한 이후 그는 1958년 이후 1978년까지 5선의 국회의원이 된다.

유신이 종말을 고해가던 시기인 1979년 야당인 신민당 내부에선 이철승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타협과 협조를 기조로 하는 이른 바 ‘중도통합론’ 세력이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강경노선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정운갑은 여기서 ‘중도통합론’쪽에 선다. 결국 ‘중도통합론’이라는 것은 박정희 정권에 백기를 드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정국은 10·26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접어드는데 당시 신민당 내분 사태에 박정권이 깊숙히 개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정운갑의 아들인 정우택 의원은 요즘 자민련을 탈당해 유력한 대선 후보의 정당으로 입당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어디서 기인하는가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 같다.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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