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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9.1.22 화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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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따라 변화의 역사가 시작됐다[근대 수원의 역사문화 공간]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수원역 중심 전통 장시쇠퇴 역세권 형성
3·1운동땐 만세시위 전파… 이젠 천안까지 전철화 마쳐

   
굉음을 내며 달리는 시커먼 놈! 그놈의 질주는 근대의 무자비함과 속도의 쾌락을 알려주었다. 그 시커먼 놈은 바로 기차였다. 그것은 근대문명의 기호이자 시간을 구속하는 일상을 상징하며 우리 곁으로 왔다. 

우리 조상은 새벽 닭 울음소리에 깨어나 일하고 어둠과 함께 잠드는 순환적이고 자연적인 삶을 수 천년동안 이어왔다. 그 자연적인 삶은 노동과 휴식이 철저하게 구분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기차는 ‘정시 운행’을 통해 정확한 시간을 강제하였다. 그것을 탓하는 자를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한 시골영감’으로 매도해 가며 기차는 시간에 속박된 근대적 시스템을 각인시키며 이 땅의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을 굉음을 내며 찢어가고 있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조차 기차는 1등석과 2등석 등 돈으로 계산하게 만들며 신분적 질서조차 철저히 해체해갔다. 1900년을 전후하여 전세계적으로 부설된 철도는 세계자본주의의 팽창과 산업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통수단이 되었다. 이는 단지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 이외에 각 분야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 기차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식 건축의 대표로 자리잡은 수원역 모습.


특히 한반도를 X자 형태로 철도를 부설한 일제는 한국의 물산과 일본의 군대를 대량으로 실어 나르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해갔다. 경부선은 1901년 9월 21일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일본자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고 그 해 5월 25일 서울 남대문정거장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경부철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철도부설은 한국의 자본주의화·식민지화·산업화·도시화·근대화 등 중층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철도 부설의 주체가 일본제국주의였고 부설 자본이 일본자본이었기 때문에 철도는 일제의 침략성과 수탈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왜곡·억압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아픔이었지만 당시 철도는 한국인의 삶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 경부선과 수원상권의 변화

   
▲ 출발하는 기차의 뒷모습(1994년 6월).
특히 철도로 인한 상권의 변화는 한반도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다. 기차 길이 열리면서 기차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소위 역세권(驛勢圈)이 그것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장시(場市)를 해체시키며 기차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장시가 있는 전통적인 도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기차역을 개설하였고, 역 주변의 조선인 토지는 헐값에 수용되어 다시 일본인들에게 불하됨으로써 역세권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철도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은 규모있는 도매업을 장악하였고, 조선인들은 그 아래에서 소매업을 함으로써 식민지 경제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는 전통적인 장시(場市)의 변화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수원의 상권은 화성의 성안과 성밖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부선이 개통되고 수원역이 팔달산 서남쪽에 생기면서 수원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세권이 형성되었다.

성안에 3대 이상 살아가는 사람을 찾기 힘든 현실이다. 6·25전쟁과 70, 80년대 동수원 개발로 대규모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성안에 살던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돈 많고 소위 ‘깨친’ 사람들을 서울로 가서 살게 만들었다. 서울과 가까운, 서울과 너무 가까운 도시 수원이었던 셈이다. 철도가 생기면서 가장 큰 변화는 서울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서울로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기차는 일상에 속도를 불어넣었고, 공간을 무시하게 되었다. 하여 수원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땅이 되었다.

경부선이 개통된 몇 년 뒤인 1910년 수원역을 통해 쌀과 콩 그리고 땔나무가 가장 많이 실려 나갔고, 목재·석유·연와(煉瓦)·명태(明太) 등이 수원에 부려졌다. 특히 명태는 북쪽 원산에 집결해 장돌뱅이들의 발품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었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경부철도 개설 이후 명태는 원산에서 배를 통해 부산으로 와서는 곧바로 기차로 실려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기차는 이들 전통적인 장돌뱅이들의 몰락을 가져왔고, 전통적인 장시(場市)의 쇠퇴를 가져왔다.

반대로 기차역이 지나는 장시는 또 다른 번성을 가져와 대도시로 변화시켰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천안, 대전 등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차역이 위치한 수원·오산·평택은 남쪽으로 가는 제주로(濟州路)의 전통적인 대로(大路)의 혜택에 더하여 기차운송으로 인한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수혜의 대상이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닌 일본인들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수원은 전통적으로 화성의 남문 즉 팔달문 주변이 최대의 상권이었다. 그러나 경부선이 뚫리면서 수원의 서쪽 변두리에 불과했던 수원역 주변은 새로운 상권으로 부각되었다. 이에 수원역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일본인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수원역 주변에 집중되었다. 1906년 일본인 소학교가 수원역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고, 수원역전 우편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권업모범장(농사시험장)과 농림학교가 서둔리에 설치된 것도 정조 때 축조된 축만제(서호)의 이점을 살린다는 점과 더불어 수원역에서 멀지 않다는 점이 크게 고려되었던 것이다.

● 기차길, 또 다른 저항의 동력

기차의 등장은 서울로 이주는 아니어도 서울 유학을 보다 쉽게 만들었다. 그나마 서울 유학이 어려운 경우 기차를 이용한 통학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한양 100리 길 새벽 닭 울음소리 듣고 나선 그 길은 별빛을 받으며 서울로 입성하였던 고단한 노정이었다. 그러나 기차는 단 2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서울에 닿게 했다. 기차 통학생들의 등장은 근대 문물의 빠른 흡수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중심에 통학생들이 있어 서울의 새로운 소식과 문물은 빠르게 수원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수원을 비롯한 기차역이 지나는 지역은 만세시위가 전파속도가 빨랐다. 이후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인 박선태·이득수·임순남 등은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을 위해 수원역에서 가까운 서호에서 구국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 각성된 청년학생들은 1920~30년대 수원을 비롯한 경기남부 지역의 궁핍화와 연계되어 광범한 운동을 펼쳤다. 자작농의 해체와 소작농의 증가 그리고 저지된 공업화에 따른 낙후된 생산성으로 농민저항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궁핍한 농민을 향한 수원지역의 고리대금업자들의 광범한 존재는 수원지역민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수원의 성안 호수가 3천호 가량 되었는데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가 2,400호나 되었다. 이들의 고리대는 가난한 농민과 소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기남부의 궁핍화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양산해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939년 2월 2일, 80여명의 젊은이들이 어둠이 밀려드는 저녁 6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수원역을 떠났다. 먹고 살기 어려운 처지의 그들은 성진항 수력발전소 공사장으로 하루 1원 내지 1원50전의 품삯에 팔려가는 박순성(朴順成, 28세)을 비롯한 노동자들이었다.

경기남부의 궁핍화는 수원천-황구지천-진위천-안성천으로 흐르는 경기남부의 안성천 문화권의 각 지역의 결속을 가져왔다. 이는 동시에 철로를 따라 저항의 움직임을 조직되었음을 뜻한다. 수원과 오산 및 서정리 등 기차역을 근거지로 하는 조직들이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수원과 진위(평택)의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조직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조직이 수진농조(水振農組)가 대표적이다.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 출신의 박승극(朴勝極)과 평택 두릉리의 김영상(金榮相), 서정리 남상환(南相煥) 그리고 오산의 변기재(邊基在)·공석정(孔錫政) 등이 그들이다.

● 협궤열차, 수인선과 수여선

   
▲ 수도권 개발과 전철의 대중화로 1995년 수인선은 폐쇄됐다. 고색부근에 남겨진 수인선 철로모습(2007년 7월).
수원에서 출발하여 사리-원곡 등 지금의 안산지역 연안을 따라 인천까지 이어진 수인선(水仁線)은 일본 자본에 의한 조선 수탈의 상징적 존재였다.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가 공사에 착수한 지 2년만인 1937년 8월 6일 개통되었는데, 이때는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으로 일본 군수업자와 산업자본가에게는 호시절이었다. 이미 1931년 수원에서 여주까지 개통된 수여선(水驪線)과 수인선을 연결하여 하루 5번씩 운행함으로써 경기 내륙의 질 좋은 쌀과 군자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쉽게 인천으로 반출하고 일본제 상품들을 내륙 깊숙이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수원에 본사를 두고 경기도 내륙지방 철도와 자동차·선박 등의 운수영업을 하던 회사였다. 이에 경부선과 수여선 및 수인선의 결절점에 위치한 수원역은 경기남부 지역의 교통의 요지로 수원은 경기남부의 대표적 도시로 거듭 나게 되었다.

이들 수인선과 수여선 협궤열차는 해방 후 한동안 허기진 영혼과 일상의 권태를 못견뎌 하며 느닷없거나 뜬금없이 기차여행을 감행하게 만들곤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수도권 개발과 전철이 대중화되고, 수원-안산-인천의 축선보다 수원-서울, 안산-서울, 인천-서울간 물류 이동이 서울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1995년 수인선은 폐선되었다.

   
▲ 수원역은 민자역사로 새롭게 단장되고 천안까지 전철화됐다. 수원역 부근 전경.

현재 고속철도(KTX)가 스쳐지나가는 수원이지만, 수원역이 민자역사로 새롭게 단장되고 천안까지 전철화되면서 수원역 앞의 번성함은 옛 남문 앞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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