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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9.4.19 금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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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대 너른 마당서 '녹음놀이' 즐겨볼까[근대 수원의 역사문화 공간]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수원화성 동쪽 ‘동장대’ 활쏘기·군사훈련 하던 곳
대한제국 선포후 ‘자강운동’ 타고 각종 운동회 열려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한번은 다녀와야 하는 곳이 군대이다. 일반적으로 입영통보를 받고 군사훈련을 받는 대표적인 곳이 논산 군사훈련소, 즉 연무대이다. 그곳에서 훈련받은 자들은 그쪽을 향해 오줌조차 싸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진저리를 치며 떠나왔다. 그러나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 연무대, 그곳의 군사훈련 생활이 오히려 행복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곤 하였다.

  ● 아, 연무대!

그렇게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 명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연무대는 어떤 의미였을까?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들 수 있다. 바로 근대의 기점이 되는 사건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1876년 접견대관으로 임명된 신헌(申櫶)이 일본 전권대신 구로다(黑田淸隆)와 한일수호통상조약(韓日修好通商條規),  강화도 조약의 조인·비준서를 전달한 곳이 강화부 연무대였다. 그렇게 우리 국토의 모든 연무대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 1950년대 수원화성 연무대에서 어린이들이 활을 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나라의 국력과 군사적 무비(武備)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고, 튼튼한 성을 쌓아 적을 방비하는 것은 국방의 중요한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길목에 해당하는 중요한 성곽에는 지휘본부가 있게 마련인데, 화성의 경우 팔달산 정상에 우뚝하게 서 있는 서장대, 즉 화성장대(華城將臺)가 그것이다. 서장대와 더불어 동쪽의 동장대 역시 중요한 근거지였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1795년 축성과 더불어 세워진 동장대는 동쪽 창룡문 안쪽의 넓은 구릉지에 위치하였다. 임금이 화성에 거둥할 때 군사훈련, 즉 성조(城操)을 참관했던 곳, 역시 서장대 또는 동장대였다. 동장대 북쪽으로 사대(射臺)를 만들어 활쏘기를 연마하도록 했고, 건물 행랑과 담 밖에는 넓은 훈련장을 만들어 군사조련을 실시하였다.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장소였던 셈이다.

이에 동장대의 또 다른 이름이 연무대(鍊武臺)로 불리게 되는 바, 처음부터 연무대로 불렸을까?

화성을 쌓고 난 직후 정조는 화성의 주요시설물들을 순행하였다. 동장대 역시 정조가 직접방문하였던 곳이다. 1797년(정조 21) 정조 임금은 화성 거둥 때 동장대에서 수행하는 채제공의 시 ‘동장대에서 한가위 달구경하다’는 시운(詩韻)에 맞춰 직접 시 한수를 읊었다고 후대 임금들이 동장대를 찾아왔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록에서 연무대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 언제부터 연무대라 불렸을까?

그럼 언제부터 연무대라 불렸을까? 아마도 동장대가 연무대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고종연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동장대에 ‘연무대’ 편액이 붙고 난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1899년(광무 3) 편찬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 에는 동장대에 ‘연무대(鍊武臺)’ 현판 1좌와 상량문 현판 1좌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동장대 상량문은 정조 때 규장각 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었으니, 이를 새겨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무대 현판에 대한 기록은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와 1831(순조 31) ‘화성지(華城誌)’에도 없다. 다만 ‘화성지’에는 편액을 단 건축물로 동서남북의 4대문인 팔달문·화서문·창룡문·장안문과 서장대의 ‘화성장대(華城將臺)’, 동북각루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서남각루의 ‘화양루(華陽樓)’, 동북포루의 ‘각건대(角巾臺)’ 등을 기록하고 있다.

즉 작은 건물인 동북포루의 각건대까지 언급하고 있음에도 화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동장대의 ‘연무대’ 편액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애초부터 동장대에는 편액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애초부터 동장대가 연무대로 불렸던 것은 아닌 듯하다.

1870년(고종 7) 동장대에서 야간군사 훈련인 야조(夜操)를 하였을 때에도 연무대에 대한 언급은 만날 수 없다.

한편 연무대 편액은 민승호(閔升鎬)가 수원유수로 부임하였을 때 써서 편액한 것이라 한다. 민승호는 1872년 11월 화성유수에 부임하여 이듬해 9월 병조판서로 이임할 때까지 10개월간 근무하였다. 우리가 잘 알듯이 명성황후의 오라버니로 감고당에서 어머니 한산이씨와 더불어 폭사한 인물이다. 선물로 받은 꾸러미가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명성왕후는 이를 흥선대원군의 소행으로 여겨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민승호가 썼던 연무대 편액은 일제말기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과 담장이 없어진 연무대는 더욱 더 넓은 공터가 되어 갔다. 

● 운동회가 열리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자강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학교 설립운동이 펼쳐지면서 학교를 통한 운동회는 고종황제의 장려로 급속하게 일상으로 퍼졌다. 고종황제와 황태자 및 황후가 직접 운동회를 참관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이에 운동회는 학교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일반 직장에서도 운동회를 개최할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물론 개신관료나 계몽운동가들은 운동회를 애국충군과 개화계몽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고, 일반대중들은 운동회를 지역공동체의 축제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운동회는 사회체육 기능과 더불어 마을 공동체의 축제로 자리매김 되었다. 운동회에 들어가는 경비는 지역 주민들과 유지들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민족의 축제인 단오와 비슷한 시기에 봄 운동회가 열렸고, 추석을 전후하여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회 경기에서 체조는 단체행동과 학교 교육의 절도를 보여주는 시금석이었다. 학생들과 교원 등 수백 명이 손발을 맞춰 하는 율동은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장관이었다. 이들의 탄성과 설렘은 빨리 강한 군대를 만들어 남에게 침략을 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꿈꾸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황성신문’은 화성 성안 공사립학교가 춘계 연합운동회를 1908년 4월 22일 거행할 것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장소가 바로 동문 안 연무대였다는 점이다.

이즈음 화양여학교와 삼일여학교 학생들의 연합운동회가 버드내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상유천 아래에서 넓은 공터에서 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화양여학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화양학교를 의미한다.

이후 1910년 7월 통감부는 연무대 건물에 자혜의원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읍내에서 거리가 멀고 난방시설에 문제가 있어 그 장소를 화령전으로 옮겨 개원하였다. 그래서 여전히 연무대는 넓은 공터를 지닌 장소이자 소나무밭과 어우러져 많은 행사가 이루어졌다.

1919년 3월 수원의 만세운동은 북문안 화홍문을 비롯하여 3월 16일 장날에는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에 각각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원군내 각 보통학교 연합운동회가 1924년 5월 18일 연무대에서 개최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연무대에는 활터가 있다. 정조 때 이래로 수원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길고 긴 新長路는 어느듯 東門에 다다랏다. 廢墟가 다 된 東門은 옛성을 직히고 잇서 달아래 흔들니는 굽은 소나무 소리를 드르며 즐비한 草家들을 거나리고 雄狀이 서 잇다. 어머니나 발서 東門일세.
… 東門을 드러스니 놉히 보이는 練武臺는 옛 활쏘든 터를 남겨두고 사이로 흰 하눌이 보이는 기둥만 몃 개 달빗에 빗최여 보인다.’

나혜석이 봉녕사에 놀러가서 저녁밥으로 산채비빔밥을 사서 먹고 살고 있는 남수문 아래 지동으로 돌아오는 길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1936년 5월, 신록의 계절을 맞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주최로 200여 명의 여성들이 연무대에서 다양한 놀이를 하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 서호- 항미정을 거쳐 수원의 자동차를 모두 전세 내어 화홍문-방화수류정을 구경하고 연무대에 집합하였다.

소위 ‘수원 녹음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연무대 앞에는 구름같은 차일이 몇 동 쳐지고 협찬한 축음기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수원의 일류 요리집인 제일관(第一館)에서 준비한 점심이 돗자리마다 펼쳐졌다. 이 음식은 수원의 유지인 차준담과 신현익이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경기와 행사가 진행되었으니 이들을 구경하고자 모여든 수원사람들은 송림 사이에 자리 잡아 1,000여 명의 관중들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 솔밭은 연무대와 방화수류정 사이의 동공원(東公園)으로 불리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정조 대 이래 동장대의 암문을 통해 연무동의 넓은 연병장은 공설운동장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늘어난 피난민들은 이 넓은 공간을 밀고 들어와 피난민촌을 형성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초가집과 염색공장이 혼재한 이 지역의 피난민들의 삶은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의 ‘용두각을 찾아서’라는 단편소설의 소재와 주요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 연무대 활터에서 시민들이 활쏘기 체험을 하고 있다.

   
▲ 현재 연무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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