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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석 上] 일제때 활발한 사회·계몽활동수원인물열전 69 -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은 1890년 8월 14일 수원군 신풍동에서 나기정(羅基貞)의 2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나홍석(羅弘錫)과 여동생 나혜석과 더불어 일찍 시집간 계석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유학을 했다.

1910년 동경 정칙(正則) 영어학교에서 2년간 수업을 한 뒤 동경고등공업학교에 진학, 3년간 화공학을 전공하고 1914년 7월 졸업했다. 1915~1918년까지 오사카 재일 동포의 빈민굴에서 함께 생활하며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 아나키즘 사상가인 오스기(大杉榮)·이쯔미(逸見直造) 등과 교유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됐다. 나경석은 당시 필명 공민(公民)으로 당시 초기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며 활발한 사회활동과 계몽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1918년 귀국해 1년간 중앙중학교 물리교사로 근무했고,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 1000부를 만주 길림의 손정도(孫貞道) 목사에게 전달했다. 돌아오는 길에 무기 10자루를 구입해 입국하다가 발각됐다.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미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개월에 처해졌다. 그후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면서 원산을 거쳐 두만강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교포 2세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약 3년간 활동했다. 이 기간 중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만주로 가는 길], [노령견문기] 등의 글을 기고했으며, 1921년 일본 니카타현 조선인 학살사건 때는 동아일보사의 위촉으로 김약수(金若水)와 더불어 도일해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했고,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보고 연설회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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