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최초 인터넷신문- 일간지 최초 온라인 전환 신문
updated. 2019.4.19 금 08:12
HOME 한민족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수원의 논개 33인의 꽃 '김향화'[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4)

하얀 소복 입고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대한문 앞 엎드려 통곡하던 이들

꽃반지 끼고 가야금 줄에 논다 해도 말할 이 없는
노래하는 꽃 스무 살 순이 아씨

읍내에 불꽃처럼 번진 만세의 물결
눈 감지 아니하고 앞장선 여인이여
춤추고 술 따르던 동료 기생 불러 모아
떨치고 일어난 기백

썩지 않은 돌 비석에 줄줄이
이름 석 자 새겨주는 이 없어도
수원 기생 서른세 명
만고에 자랑스러운 만세운동 앞장섰네

김향화 서도흥 이금희 손산홍 신정희
오산호주 손유색 이추월 김연옥 김명월
한연향 정월색 이산옥 김명화 소매홍
박능파 윤연화 김앵무 이일점홍 홍죽엽

김금홍 정가패 박화연 박연심
황채옥 문롱월 박금란 오채경
김향란 임산월 최진옥 박도화 김채희

오! 그대들 수원의 논개여!
독립의 화신이여!

 

   
▲ 청초한 김향화 모습, 기생의 몸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그때 친일 안한 사람 어딨냐는 궤변은 이제 듣지 않길 바란다.(사진제공=이동근)
● 김향화(金香花, 1897. 7. 16~ 미상)
 
1919년 3월 1일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은 수원 지방에서도 있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29일자에 보면 “수원은 3월 25일 이후 4월 4일에 이르는 동안 읍내를 비롯하여 송산, 병점, 오산, 발안, 의왕, 일형, 향남, 반월, 화수리 등 군내 각지에서 연이어 시위가 있었는데 대체로 수백 명이 모였으며 더욱 장날을 이용한 곳에서는 천여 명이 넘었다. 일경의 발포로 수십 명이 사상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29일 읍내 만세 때는 기생일동이 참가하였고 기생 김향화가 구속되었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행화(杏花), 순이(順伊)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김향화는 3월 29일 경기 수원군 자혜병원 앞에서 기생 3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수원 기생조합 출신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려고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동료와 함께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주도하여 의기(義妓)로서 기상을 높였다.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에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했다는 것은 강심장이 아니고는 행동에 옮기기 어려운 일이다.

김향화가 속한 기생조합은 1914년 이후 일제에 의해 일본식 명칭인 ‘권번’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권번은 파티나 연회장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일본 내 기생들의 기관이자 기생학교였던 ‘교방’의 기능을 민간에서 모방한 것으로 대정(大正,1912~1926) 기간에 일본에서 예기들의 조합을 좁혀서 ‘칸반(爛番)’이라고 하였고, 조선총독부는 그 한자음을 따와 ‘권번’ 시대를 열어갔다. 권번은 어린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요릿집 출입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김향화는 특히 검무와 승무를 잘 추고 가야금을 잘 뜯던 일등 기생이었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들은 고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었다. 당시 고종 임금의 승하 발표가 나자 기생, 광대, 배우들은 모두 휴업을 하고 근신에 들어갔다. 그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 백성이 모여 곡을 할 때 기생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1월 27일 고종 장례에 맞춰 수원기생 20여 명은 소복을 입고,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고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 앞에서 망곡 (국상을 당해 대궐 문 앞에서 백성이 모여 곡을 하는 것)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김향화를 중심으로 한 수원기생들의 애국 혼은 불타올랐다. 그러나 만세운동 이후 김향화의 행적은 전해지고 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에 수원시에서는 김향화의 공훈을 기려 국가에 공훈 심사를 올린 결과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와 33명의 수원 기생
                                   
"온갖 계책으로 봄을 머무르게 하되 봄은 사람을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만금은 꽃을 애석해 하지만 꽃은 사람을 애석해 하지 않아, 나의 푸른 쪽진 머리, 주홍 소매를 쥐고서 한번 넘어지면 이십 광음이 끝나도다. 누가 가곡이 근심을 능히 풀 수 있다 말하는가. 가곡은 일생의 업원(전생에서 지은 죄로 이승에서 받는 괴로움)이로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 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개성조합 이름 쫒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위는 1910년대 수원예기조합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주는 『조선미인보감』에 나오는 김향화 이야기다. 이 책은 권번과 기생조합의 기생들을 홍보하고자 펴낸 자료로 ‘풍속 교화’라는 측면에서 일제가 기생들을 통제하고 있는 식민지배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당시 수원 기생은 1918년 33여 명에서 1925년 18명, 1929년 14명에서 30여 명으로 화성권번(華城券番)으로 바뀐 뒤 1940년대에는 50여명의 기생이 있었다. 1920년대에 기생의 수가 줄어서 나타난 것은 역시 3?1운동의 여파라고 볼 수 있다. 3?1운동을 주동했던 많은 기생이 옥고를 치르면서 복귀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화성권번으로 바뀐 뒤 50여 명의 기생이 줄곧 유지되고 있었음을 볼 때 지방 권번으로서는 매우 큰 규모였을 것이다.

자혜의원 앞에서 일제의 총칼을 무서워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벌인 수원예기조합 33명 기생의 면면을 살펴보자.

   

Copyright ⓒ 수원일보

icon인기기사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당분간 한시적으로 댓글 기능을 중지합니다. [자세히 보기]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