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최초 인터넷신문- 일간지 최초 온라인 전환 신문
updated. 2019.4.19 금 08:12
HOME 한민족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한 마산의 잔다르크 ‘김두석’[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21)

배달겨레 단군의 나라
그 자손들 오순도순 사는 곳에
늑대 탈 뒤집어쓴 왜놈 나타나

아마테라스 천조대신 믿으라
고래고래 소리 내지르며
조선 천지에 신사를 만들더니
고개 조아려 모시지 않는다고
마구잡이 잡아 가두길 벌써 여러 해

제 조상 귀하면 남의 조상도 귀한 법
목숨은 내놓아도
조상신은 못 바꾼다 번번이 호통 치매
돌아 온건 감옥소 차디찬 철창신세

학교도 쫓겨나고 직장도 없이
늙은 어머니 굶주려도 
홀로 정한 양심의 서릿발에 추호의 흔들림 없이
지켜낸 신사참배 거부였어라
 
민족 자존심 높은 마산의 잔다르크
그의 공적 돌비석에 없지만
그 이름 석 자 속엔 이미
북두(北斗)의 우뚝함 새겨져 있어
천추에 기억되리
그 곧은 절개.
 

● 김두석(金斗石, 1915.11.17-2004.1.7) 

“우리는 아침 궁성요배로부터 정오묵도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정면충돌하였다. 다른 죄수들은 규칙에 따라 아침 시간에는 일어나 동쪽을 향하여 일본 천황에게 절하고 정오 12시에 사이렌이 울리면 일제히 일어나 머리를 숙여 나라를 위해, 죽은 영령들을 위해 묵념을 올리는데, 나는 그와 반대로 꿇어앉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니, 이것이 그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김두석 애국지사의 증언대로라면 이는 죽음을 불사한 행동이다. 모두 다 같이 한 곳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데 혼자만 반대 방향으로 돌아앉았으니 왜놈 순사 눈에서 불꽃이 튀길만하다. “네 이년, 불경스럽다. 궁성을 향하지 못할꼬” 큰 칼 찬 왜놈의 붉으락푸르락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우리의 김두석 애국지사는 호락호락 궁성요배에 응하지 않았다. 그것도 무려 5번이나 신사참배거부로 감옥을 드나들었으니 가히 그 높은 기개는 일반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절개다.
 
신사참배 탓에 김두석 애국지사는 마산의 민족학교인 의신여학교 교사 자리를 박탈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일로 인해 요시찰 감시 대상 인물이 되어 5회에 걸친 구금이 이어졌고 6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러야 했다.

<평양에서 고향 마산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마산경찰서에서 호출이 왔다. 요주의 인물이라고 감시 중인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마산경찰서로 갔다. 어머니는 경찰서 마당에 계시고 나는 고등계 형사실로 불려갔다. 형사가 물었다.
“평양 유치장엔 며칠 있었나?”
“28일간 있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신사참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다. 신사참배 거부생각은 변함이 없다.”
이 말을 하자마자 
“이년의 소지품을 여기 두고 유치장으로 데려갓.”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에또(江藤)라는 간수가 내가 앉았던 의자를 빼내 하마터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다. 나는 바로 안이숙 선생님께 받은 여름 핸드백과 언니에게 받은 팔목시계와 꽃양산을 압수당하고 간수 손에 끌려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김두석은 평양, 마산, 부산 등 이르는 곳마다 요시찰 인물이 되어 걸핏하면 경찰서에 불려갔으나 그때마다 신사참배 거부 의지는 꺾이는 게 아니라 더욱 강해졌다. 그의 체포는 해방을 앞둔 1년 전인 1944년 9월에도 있었는데 죄목은 한결같이 신사참배거부와 배일행위였다. 이때는 부산지법에서 무려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는데 다행히 해방을 맞아 풀려났던 것이다.

일제에 굴하지 않고 겨레의 자존심을 지킨 김두석 애국지사는 정부의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일제는 전국에 신사를 만들어 참배토록 했으며 거부하는 자들을 투옥시켰다. ①강원신사, ②대전신사, ③원산신사, ④인천신사, ⑤마산신사, ⑥용두산신사

<더보기> 조선땅 곳곳에 신사를 만들어라!

일본의 기독교 탄압 중에서 악명 높았던 것은 바로 “후미에(踏み絵)사건”이다. 이는 말 그대로 예수 그림을 땅에 놓고 밟고 지나가도록 해서 신자와 비신자를 가려 처벌하던 풍습이다. 1612년 도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의 에도막부(江戸幕府)는 기독교 금지령을 선포하고 이에 불응하는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기독교 탄압은 명치정부(1873년)에 이르러 중지되었으니 실로 261년간 무자비한 종교 탄압이 자행된 셈이다.

이런 전력이 있어서일까? 조선을 무단으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天照大神)를 조선인들이 섬기도록 강요했다.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神社)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인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바탕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대륙침략정책의 발판을 조선에 두고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이른바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장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7대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당치도 않은 국체명징(國體明徵, 천황중심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을 지껄이고 겉 다르고 속 다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 전역에 1면(面) 1신사(神社)의 설치를 강행하여 일제의 기관원들뿐만 아니라 일반  조선인들에게까지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되니 이로써 우리 동포들이 받은 정신적 타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에  어긋남을 이유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로 1938년 2월까지 장로교 계통의 9개 중학교와 9개 소학교가 폐쇄당했고 2천여 명의 교인이 옥고를 겪었으며, 2백여 개소의 교회가 폐쇄 처분을 당하게 되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각 가정에 신붕(神棚, 가미다나 곧 신전)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서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에 항거하여 김두석 애국지사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식민지통치에 맞서 저항했다.

이는 단순한 신사라는 시설에 대한 참배 거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사참배 거부는 일본인의 조상을 모실 수 없다는 조선인의 자존심이자 겨레 혼을 지키려는 철학이 밑받침되었던 역사적인 거대한 저항 운동이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인천신사는 1916.4.24, 강원신사는 1918.3.11, 대전신사는 1917,6,11, 원산신사는 1882.5.23, 용두산신사는 1917.7.10, 마산신사는 1919.6.23일에 각각 세워졌으며 일제는 이러한 시설을 전국 요소요소에 세워놓고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Copyright ⓒ 수원일보

icon인기기사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당분간 한시적으로 댓글 기능을 중지합니다. [자세히 보기]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