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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9.4.19 금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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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 한 ‘김마리아’[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22)

황해도 연안 서남쪽 포구
몽금포 해변의 반짝이는 은모래빛 벗하며
소래학교에서 꿈을 키우던 가녀린 소녀

서른넷에 돌아가신 아버님 뜻 잇고
세 자매 교육에 정성들인 어머님 의지 받들어
학문의 높은 문을 스스로 열어젖힌 억척 처녀
 
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2·8 독립의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 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지 불붙이며
잠자는 조선여자 흔들어 깨워
스스로 불태우는 장작이 되게 하신 이여!

배워야 나라를 구한다며
자유의 여신상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뼛속 깊이 갈망하던 독립의 밑거름되어
상하이 마당로 독립군 가슴에
수천 송이 무궁화로 피어나신 이여!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처럼
닭 우는소리 멈춘 동방의 조선 땅에
인자한 마리아로 나투시어
미혹의 나라를 밝히고 
온 세상에 조선을 심은
한그루 떨기나무 그 이름 김마리아

그대
무궁화동산에서 영원히 지지 않으리.

   
▲ 마르타윌슨여자신학원 재직시절(1932~1941), 앞줄 왼쪽 첫째

●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6.18-1944.3.13)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敵)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이다. 임시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먹는다. 적은 가끔 임시정부의 몰락을 선전하여도 인민은 안 믿는다. 소수로 됨은 혁명 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만의 유혈로 성립되어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지 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하고 외인(外人)은 의혹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위는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김마리아 애국지사가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해서 주장한 내용이다.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독자여서 손자를 빨리 보고 싶어 해 아버지 윤방을 아홉 살 연상인 몽은과 결혼 시켰는데 이때 아버지 나이 9살 때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태어나는 아이 셋이 모두 딸이었다. 당시 대갓집에서는 독선생을 불러 사랑방에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김마리아도 위의 언니 둘과 삼촌, 고모와 함께 ‘천자문’ ‘동몽선습’들을 배우며 학문에 눈떠갔다. 그러나 김마리아가 세 살 먹던 해에 34살이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99칸 종갓집 맏며느리 자리를 뒤로하고 세 딸의 교육을 위해 따로 이사하는 열성을 보였다.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인장들(사진제공 연동교회)
황해도 연안의 서남쪽 포구에 세운 소래학교는 광산 김씨 집안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로 이곳은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던 김마리아는 소래학교에 입학한 지 여섯 달 만에 상급생을 통틀어 전교에서 1등으로 뽑힐 만큼 총명했으며 2등은 고모인 김필례가 차지했다. 딸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던 어머니는 김마리아가 14살 되던 해 겨울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삼남매 중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켜 달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마리아는 애국지사들이 드나드는 서울의 삼촌 집에 머물면서 애국사상을 싹 틔운다. 15살이던 1906년 큰 삼촌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두 언니와 고모가 연동여학교(현, 정신여자중학교)에 다니던 때라 삼촌에게 졸라 연동여학교로 옮기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1910년에 졸업 뒤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배운 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 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들어가 황애시덕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는데 이때 조국광복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이에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독립선언서〉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2월 15일에 부산에 입항했다. 귀국 뒤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할 것을 촉구하는 등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 만세운동의 암약을 마치고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형사에게 붙잡혔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아무리 나를 고문한다 해도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너희가 빼내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당당히 맞섰는데 머리를 심하게 내리친 고문 탓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생기는 병에 걸렸고 심한 두통과 신경쇠약을 평생 달고 살아야 했다.
 
〈보안법〉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고 그해 8월 5일 석방 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진작시키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절대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의 중요 임무를 맡을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 지원에 진력하던 중,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인들과 함께 다시 붙잡혔다. 그는 심문 중 “한국인이 한국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서울 성북동 보문암(普門庵)에서 요양 중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간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는 등 학구적인 열의의 끈도 놓지 않았다.

또한, 1923년 6월에 미국으로 건너간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30년에는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황애시덕·박인덕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동지들과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 진작과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국가에 널리 알렸다.

1935년 귀국하여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맡았는데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하여 해방을 1년 앞두고 눈을 감았는데 사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1910년 이전 연동소학교에 걸렸던 태극기 앞에서 친절한 안내를 해주신 고춘섭 장로님과 함께.

<더보기> “연동교회와 여성애국지사”

1920년 5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대구감옥소 김마리아 위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에 따르면 “대한애국부인단 수령 김마리아는 작년 9월에 체포된 후로 여러 달 동안 옥중에서 신음한 결과 영양이 불량하여 병이 나서 그동안 미음과 우유만으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더니 근일에는 병세가 더욱 심층하여 미음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었으며 벌써 이틀 동안이나 절식을 하였다는데 생명이 위태하다하더라”는 보도로 보아 건강 상태가 아주 안 좋음을 알 수 있다. 악화하는 병 탓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몸을 추스른 뒤 192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그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김마리아 자료 수집을 하는 도중 서재에 꽂혀있는 <사진으로 보는 연동교회 110년사>라는 책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이것을 산 것은 10여 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청계천 헌 책방가를 서성일 때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110년’이라는 시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구한말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선뜻 샀는데 이 책에는 김마리아를 비롯하여 연동교회 출신의 쟁쟁한 애국독립지사들의 흑백사진이 즐비했다. 요즈음 구할 수 없는 귀한 사진이었다.

이 책을 만든 이는 고춘섭 장로로 얼마 전 종로의 연동교회에서 김마리아 사진 자료의 자문을  구하려고 찾아 뵌 적이 있는데 독립운동사에 남다른 관심과 열성을 가진 분이셨다. 월남 이상재 선생, 이준열사 등 쟁쟁한 애국지사가 다니던 교회라 그런지 교회 자체 내에 연동교회 역사자료관을 마련하여 고춘섭 장로  자신이 직접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경신중학교 교장 출신인 고춘섭 장로는 <연동교회 애국지사 16인 열전, 543쪽, 2009.12>에서 연동교회 출신의 애국지사 면모를 소상히 밝혀 놓았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소속 6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두 독립운동사에서는 잊을 수 없는 쟁쟁한 분들이다.

1) 오현관 : 혈성단애국부인회 창립 총재
2) 김마리아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3) 이혜경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
4) 김영순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서기
5) 신의경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서기
6) 장선희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재무부장

그뿐만 아니라 애국부인회 일에 관여하면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MCA)를 창립한 김필례 여사도 연동교회 출신이다. 김필례 여사는 김마리아의 고모이기도 한데 김마리아 집안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독립유공자로 추서 받은 사람만도 김필순(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신흥무관학교 자금지원), 서병호(대한적십자사 창설), 김순애(상해애국부인회 대표), 김규식(상해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서재현(상해 한인청년당 창당) 등이 문중 어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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