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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신채호의 동지이자 아내 “박자혜”[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26)

삼일만세 부르다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실려 오는 내 동포
치료한 보람 없이 죽어 나갔네

피 닦아 치료하던 간호사일 뒤로하고
북경으로 간 뜻은
더욱 큰 독립의 횃불 들려함이라

동지요 남편이던 꼿꼿한 역사학자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작은아들 배곯아 죽어 갈 때도
조국 광복의 끈을 놓지 않았네

일제수탈의 원흉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나석규 투사를 목숨 걸고 도운 일
세상 사람 잘 몰라도
이름 내려 한 일 아니니
애달파 마소

꿈에도 놓지 않던 광복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 감던 날
응어리진 한 위로 
무서리만 저리 내렸네.
 

   
▲ ‘박자혜 산파’ 간판은 걸었지만 산모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8. 12. 12)
● 박자혜(朴慈惠, 1895.12.11-1944.10.16)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지만 기실은 아무 쓸데없는 물건으로 요즈음엔 워낙 산파가 많아서인지 열 달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돈을 벌어 보기는커녕 간판 달아 놓은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 하루라도 빨리 가장(신채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 형무소가 있는 북쪽 하늘만을 바라다 볼뿐이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 자 기사는 박자혜 애국지사의 딱한 처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박자혜 애국지사는 경기 고양사람으로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의 부인이다. 그는 1900년대 어린 시절을 견습나인으로 궁궐에서 보냈다. 궁궐에서는 기거동작, 궁중용어, 한글, 소학, 열녀전, 규범, 내훈 등을 익혔다. 박자혜가 궁궐에서 10여 년을 지내고 있을 때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하였고 1910년 12월 30일 일제는 ‘황실령 34호’로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과 원역(員役) 326명을 해직시켰다. 이때 궁녀신분을 벗어난 박자혜는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게 된다.

졸업 뒤 사립조산부양성소를 거쳐 1916년부터 1919년 초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21년>에 따르면 의사와 간호부의 80%가 일본인으로
중요한 자리는 거의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으로 서울의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고 총독부의원에도 환자들이 몰려왔다.

당시 일본인 간호부 95명 가운데 조선인 간호부는 18명으로 박자혜도 죽을 힘을 다해 부상병 간호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되찾고자 저항하다 부상당한 동포들을 보면서 박자혜는 가만히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3월 6일 근무를 마친 뒤 간호부들을 옥상에 불러 모아 만세운동에 참여 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산원과 간호부를 모아 만든 것이 간우회(看友會)였다.

간우회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선동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각종 유인물을 비밀리에 제작해서 배포하는가 하면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피부과 의사 김형익(金衡翼) 등 동료와 결의하여 태업(怠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왜경에 체포되었다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일제를 위해 더는 근무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중국 북경으로 떠나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다녔다.

3·1만세 운동 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경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몰려들었다. 이때 신채호도 북경으로 오는데 신채호는 고향에서 풍향 조 씨와 결혼하여 아들 관일을 두었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한 뒤 부인 조 씨와 결별하고 10년간 북경에서 독신으로 지내던 터였다. 24살의 박자혜와 15살 위인 신채호의 중매는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였다. 당시 박자혜는 여대생 축구팀을 조직하여 주장으로 활동할 만큼 활발한 성격이었다. 이들이 북경에서 신혼생활을 한 것은 2년이 채 되지 못한다.

독립운동가로 일정한 수입이 없는 신채호로서는 결혼 이듬해 태어난 아들과 부인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이미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더는 배를 곯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부인과 아들을 귀국시키고 자신은 북경 소재 관음사에서 역사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귀국한 박자혜의 삶은 이때부터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데 북경에서 돌아와 서울 종로구 인사동 69번지에서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었지만 수입이 신통치 않았다. 어지간한 난산이 아니면 조산원을 찾지 않던 시대였으나 하루가 다르게 조산원 개업은 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억척스럽게 수범, 두범 두 아들을 키우는 한편 남편 신채호와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에 드나드는 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석주의 거사를 도운 일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12월 28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7명을 살상시킨 나석주 의거는 세상을 발칵 뒤집었는데 이때 나 의사를 도운 사람이 박자혜였다. 황해도 출신인 나석주는 그 당시 서울 지리에 어두웠기에 박자혜가 나선 것이었다.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 목숨을 건 일이었다.

1936년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죽은 뒤 둘째 아들 두범은 영양실조로 1942년 사망한다. 조국과 남편, 아들을 잃어버린 박자혜 애국지사는 잦은 연행과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을 해쳐 결국 병으로 1944년 10월 16일 해방을 채 1년 앞두고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2009년 7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높은 나라정신 사랑을 되새겼다.

            
<더 보기> 단재 신채호 할아버지의 반쪽 손자

-할머니 박자혜 애국지사가 신채호 호적에 오르지 못하는 사연-
 
단재(丹齋) 신채호선생이 순국한 지 73년 만인 지난 2009년 선생의 가족관계등록부(호적)에는 아들과 손자의 이름이 올랐다. 따라서 단재 선생은 “황국신민이 될 수 없다.” 하여 일제 호적법을 거부했다가 무국적자가 된 이후 이제야 호적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부가 2009년 3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 데 따르면 신채호 선생은 가족관계등록부에 총각 상태인 “나 홀로 호적”으로 올라 가족들과 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였었다.

이에 선생의 친손자인 신상원 씨는 할아버지(신채호)와 아버지(신수범)의 친자관계(親子關係)를 인정해 달라며 소송을 냈다. 그러자 재판부는 "제적등본과 고령신씨 세보 확인 결과 신씨의 아버지 신수범은 신채호 선생의 아들로 기재돼 있어 선생의 친생자란 사실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선생과 아들 그리고 손자로 이어지는 가족관계는 확인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렇게 남자들은 3대의 기록이 제대로 되었는데 문제는 단재 선생의 부인이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가족 관계이다. 법적으로 단재 선생의 부인이 호적에 없으므로 단재 선생은 총각인 상태로 아들을 낳은 꼴이 되어 그 아들 신수범 씨는 어머니가 없고 그 손자 신상원 씨는 할머니가 없는 상태로 남은 것이다.

단재 선생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자혜 여사는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2009년 7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높은 나라정신 사랑을 되새긴 인물이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여사가 "현행법 아래에서 법률상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라는 이유를 들어 신채호 선생의 가족관계등록부에 부인으로 올려주지 않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남의 땅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하기도 바쁜데 어느 정부에 혼인신고를 했을 것이며 호적정리에 신경 쓸 경황이 있었을 것인가? 아니 신채호 선생이 일제 호적을 거부했기에 상식을 동원해도 혼란기의 상황을 무시한 ‘혼인관계 미확인’이란 궁색한 변명은 부부 독립운동가에게 들이댈 잣대가 아니다.

당시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여사는 북경에서 혼인을 하여 수범과 두범 형제를 두지만 1936년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둘째 아들 두범은 영양실조로 1942년 사망한다. 이들 신채호와 박자혜 부부의 결혼 사실은 보훈처 공훈전자 사료관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사료관 박자혜 편에는 “1919年 3.10 朝鮮總督府 附屬病院의 助産員 및 看護員들을 動員하여 獨立萬歲를 主導하고 國公立病院의 同僚들을 包攝하여 怠業을 主動하다가 被逮投獄된 일이 있으며 곧 中國으로 脫出하여 申采浩와 結婚하고 男便의 光復運動을 積極支援하다가 1924年 歸國하여 獨立志士들간의 連洛, 情報, 便宣提供 等을 하다가 獨立運動으로 인하여 얻은 持病으로 49세를 一期로 死亡한 功績이 있으므로 大統領表彰에 該當하는 者로 思料됨.”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제 모두 고인이 되어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여사는 신채호 선생의 고향인 충북 청원 선산에 합장 되어 있다. 부부도 아닌 사람들이 한 무덤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나라 잃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떠난 망명지에서 중매로 만나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동지이자 아내요 어머니로서의 한 세상을 살다간 박자혜 여사는 ‘혼인증명서를 대라’는 이상한 대한민국의 법 조항에 걸려 신채호 집안 호적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안타까워 손자 신상원 씨는 어떻게라도 할머니 박자혜를 가족관계등록부(호적)에 올리려 하지만 친일파의 재산 찾기에 손을 번쩍 들어주는 대한민국의 법은 미동도 않은 채 ‘혼인사실 증명서가 있느냐?’만을 되뇌고 있다. 말하자면 신상원 씨는 박자혜 할머니가 없는 단재 할아버지의 반쪽 손자인 셈이다. 그 해결은 전적으로 정부가 팔 걷어붙이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게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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