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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창으로 다구찌 도지사 혼쭐낸 제주 해녀 “부춘화”[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29)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가슴 저 밑바닥 속
한 줌 한을 꺼내 말리던
불턱에 겨울바람이 일고 있오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
무자맥질 숨비소리 내뱉으며
거친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린 처녀의 꿈

짓밟고 착취하며
검은 마수의 손 뻗치려던 도지사 다구찌 놈
보란 듯이 빗창으로 혼쭐내던
세화리 장터의 억척 여인이여!

그대의 분노로
저들의 야수는 꺾이었고
그대의 피흘림으로
조국 광복은 한발 앞서 이뤄졌나니

평화의 섬 제주를 찾는 이들이여!
세화민속오일장 한 접시 회 마주하고
부디 말해주소
해녀 부춘화의 간담 서늘한 애국 이야기를!


*불턱: 해녀들이 물 밖으로 나와서 모닥불을 지피고 젖은 옷을 말리는 곳
*숨비소리: 해녀들이 작업하다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호오이’하며 길게 내쉬는 숨소리
*빗창: 전복채취 때 쓰는 쇠갈고리

   
▲ 제주 해녀 시위 기사(동아일보 1932. 1. 26~29일 자)

● 부춘화(夫春花, 1908.4.6-1995. 2.24)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항일운동 가운데 여성운동과 어민투쟁의 측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해녀 항일운동사건의 주동자인 부춘화 여사는 1908년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나 15살 때부터 물질을 배웠다. 낮에는 힘든 물질을 하면서도 밤이면 하도 사립보통학교의 야학부에 들어가 세화리 출신 부대현 선생과 하도 출신 김순종, 오문규 선생으로부터 민족의식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는 동안 민족 자주정신을 싹 틔웠는데 1931년 5월 일제에 의한 해녀 착취가 극에 달하자 이를 저지 하고자 해녀들을 단결시켜 일제와 투쟁을 결행하였다.

연약한 여성으로서 특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해녀로서 악독한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항일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저변에 민족 자주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고 있던 비밀결사조직인 혁우동맹(문도배, 한원택 선생) 젊은 청년들의 힘이 컸다.

일제는 해녀항일운동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려고 목포 응원경찰대까지 동원하여 1932년 1월 26일 사건 연루자 100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고자 해녀대표인 부춘화 여사는 해녀 1,500여 명을 동원하여 검속 경관대를 습격하여 무장경관대에 격렬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때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부춘화 여사는 모든 것을 자신이 단독으로 주도하였다고 자수하여 전라남도 경찰부 순사들이 철수하는 경비선으로 목포 유치장에 압송되어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1932년 7월 미결수로 석방되었다.

석방 뒤에도 계속되는 왜경의 감시와 미행으로 1933년 1월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촌 언니 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7여 년간 가내공업을 하면서 지내다가 구좌면 세화리 출신 고한일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고 오사카에서 살았다.

광복 뒤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고향 세화리에서 부인회장을 하면서 해녀들의 권익 옹호에 힘썼으며 이후 부산, 서울 등지로 거처를 옮겨 살다가 1995년 3월 24일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춘화 애국지사는 김옥련 애국지사와 함께 2003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포장’을 추서 받았는데 이는 제주잠녀항쟁이 항일투쟁이었음을 국가로부터 정당하게 평가받은 것으로 제주도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 물질 가기 전 해녀들의 회의하는 모습 (1930년대)
    

<더보기>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한다

1.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2.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 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가 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이룬다

3.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은 착취기관 설치 해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 해간다
   가이없는 우리 해녀 어데로갈까?

제주해녀들은 낮이나 밤이나 이 노래(제주해녀의 노래, 강관순)를 부르며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안주하지는 않았다. 세화리 장터를 찾은 2011년 12월 14일은 겨울바람만이 휑하니 불어 댈 뿐 5일장(3.8일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 모든 것이 황량했다. 해녀들의 권익을 주장하던 그 장터 어귀에는 세화오일장터를 알리는 커다란 선간판만이 그날의 함성을 대변하는 듯했다.

“나는 1922년 당시 15살 때부터 해녀 생활을 하며 구좌읍 보통학교 야학부에서 국문(한글)공부와 개화기 여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21살이던 1928년 제주도해녀조합(어업 조합 전신) 산하의 조직인 구좌면 해녀 대표로 선임되어 해녀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31년 5월 일본 식민지 정책하에서 제주도 해녀조합(당시는 제주도지사가 조합장 일을 장악하고 겸임)의 운영이라는 미명으로 해녀들이 어렵게 채취한 해산물을 일본인 주재원으로 하여금 일괄 수납시켜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강제적 침탈 행위의 중단을 수차 건의하였으나 시정되지 않자 구좌면 해녀 회원들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며 직접 진정서(9개 항의 요구사항)를 작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7일 제주도사가 제주도 내 순시차 구좌면 세화리를  경유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해녀회장인 나는 동료 김옥련, 부덕량에게 조직적으로 연락하여 구좌면 세화리를 중심으로 한 이웃 자연부락별로 조직된 해녀 1천여 명을 소집시켜 해녀복과 해녀작업 차림으로 무장케 하여 때마침 세화리 시장(경창 주재소 부근)을 지나가는 도사(도지사)의 행차를 가로막고 해녀의 권익옹호와 주권회복을 요구하며 해녀노래를 합창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했는데 이때 제주도사는 혼비백산하여 피신 도주하게 되었다”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중에서 부춘화 여사 증언 부분-

   
▲ 제주도 출신 여성들이 여럿 참여한 오사카 기시와다(岸和田) 방적 여공들의 노동쟁의 장면(1930년대)

그렇다. 독립운동은 육지에서만 일었던 것이 아니다. 1932년 눈보라 치는 1월 제주의 하도, 종달, 세화, 우도, 시흥, 오도리 지역 해녀 1천여 명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그녀들은 제주항일 투쟁의 선봉장이었다. 해녀의 권익을 보장해주어야 할 해녀조합은 어용화 되어 횡포가 날로 심해가는 가운데 1930년대 성산포에서는 해초부정판매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항의하러 갔던 현재성 등 4명을 경찰이 검거하고 29일간 구류에 처하자 지역청년들과 해녀들은 사건의 진상과 당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격문을 작성하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성산포 사건을 통해 해녀들은 관제해녀조합에 대한 저항의식을 싹 틔우게 되었고 자생적해녀회를 조직하여 단결해나갔다.

그 무렵 제주도사 겸 어업조합장인 다구치(田口禎熹)가 자동차로 세화리를 통과하자 해녀들은 “우리들의 진정서에 아무런 회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해녀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한다.고 맞섰다.

1931년부터 1932년 1월까지 계속 되었던 제주도 해녀투쟁은 연인원 17,000여 명의 참여와  연 230회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제주도 해녀들이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하였던 생존권수호 운동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민족 울분 표출의 거대한 항일운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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