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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친 “이은숙”[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2)

고려의 충신 목은 이색 집안의 피를 이은 스무 살 규수
고향땅 떠나 살 에이는 추위 속 첩첩산중 험준한 고개 넘어
강냉이 좁쌀 죽 기다리는 만주땅 횡도천 시집살이

바닥난 뒤주 긁어
조국광복 꿈꾸며 문지방 드나들던
수십 명 투사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독립투사 아내의 길 묵묵히 걸어온 삶
 
만주로 상해로 불철주야 뛰던 남편 소식 끊어지고
어느 해 쓸쓸한 가을
노오란 국화만 고향의 그리움을 더하던 날
총 들고 몰려든 마적 떼에 총상 입고
어린 남매와 피투성이 되어 사경을 헤맨 것과
 
어린 아들 화롯불 뒤집어쓰고
사랑하는 딸 천식으로 죽어 가도 치료비 없어
기침 소리 유난히 가슴을 치던 그 밤의 슬픔들은
조국을 빼앗긴 설움이 잉태한 천형(天刑)이었어라

애오라지 독립의 횃불 들던 낭군을 위해
유곽의 삯바느질 마다치 않고
바늘 끝에 수없이 찔려 피 흘리며
독립자금 마련한 그 모진 풍파
가냘픈 붓끝으로 다 그리지 못해

가슴에 한을 품고 사무친 마음으로
님에게로 돌아갔으리
무심히 흰 눈송이 내리던 날에.


   
▲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애국지사의 아내 이은숙 여사. <사진=우당기념관>
● 이은숙(李恩淑, 1889.8.8 - 1979.12.11)

1889년 충남 공주에서 아버님 이덕규(한산 이씨)와 어머님 남양 홍씨의 외동딸로 태어나서 1908년 우당 이회영 선생과 결혼하였다. 이때 이회영 선생은 나이 42살로 상처를 한 상태이고 이은숙 여사는 스무 살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던 해까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내조하면서도 일시 귀국 중에는 민족혁명 배후에서 내외 연락과 독립자금을 마련하느라 모진 고생을 감내하였다.

1932년 남편인 우당 이회영은 한일연합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고자 만주로 향하던 중 대련에서 왜경에 잡혀 11월 17일 66살의 일기로 고문치사 당하여 순국하였다. 당시 이은숙 여사 나이 44살이었다. 이후 77살 되던 해에 자서전을 집필하여 1975년 ≪독립운동가의 아내 수기≫를 펴냈는데 이후 이 책은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일명 서간도시종기≫로 엮어 나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서간도시종기≫라는 책을 통해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의 삶을 알았다. 이 책을 손에 집어들고 마땅히 독립운동 아내들이 겪는 그런 고생이려니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이들의 삶은 처절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남편을 둔 아내로서의 삶은 상상을 뛰어넘는 고난의 연속임을 알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나는 희망이란 낱말을 찾아내었다. 구절구절 나라의 운명에 긍정적으로 동참하는 이은숙 여사의 마음은 청정한 호숫가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고 깨끗했으며 단아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내 고생을 다 말하면 책 몇 권은 나온다.”라는 말들을 하곤 했지만 그것은 대개가 자신의 고생담에 불과하다. 그런 고생담 하나 없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아 낸 분들의 고생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맞바꾼 삶이었기에 질이나 양으로 고난의 농도면에서도 그러하다.

“여성은 독립운동에서 뒷바라지뿐만 아니라 생활 대부분을 떠맡고 아이들 양육까지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남성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집안일은 전적으로 여성이 책임을 진다. 만주 이역에서 도와줄 일가가 없을 때
그 책임은 무한대이다. 체포되어 감옥에라도 가면 옥바라지도 떠맡아야 한다. 이처럼 독립운동은 여성의 엄청난 노고와 희생이 필요하였다.” 서중석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에서 여성의 독립운동 지위를 그렇게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무한책임’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 ‘무한책임’을 담당했던 여성들은 광복군에 가입하여 뛰고 싶어도 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광복군이나 각종 애국단체에서 활약하고 싶어도 집에 몰려드는 독립운동가들 수발만으로도 벅찼기에 이들의 이름 석 자는 그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았으며 이들의 ‘무한책임 독립운동’은 그동안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남편이 북경으로 돌아와 3천 리 타향에 부부상봉하고 살림을 시작하게 되니 든든하고 반갑기가 세상에 나 한 사람인 듯하였다. 연약한 체질에 피로도 돌보지 않고 사랑에 계시는 남편 동지 수삼십 명의 조석 식사를 날마다 접대하는데 혹시나 결례나 있어서 빈객들의 마음이 불안할까, 남편에게 불명예를 불러올까 조심하고 지낸 것이 남편을 위할 뿐 아니라 남편의 동지도 위해서였던 것이다.” -≪서간도시종기≫, 이은숙지음 -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독립군의 뒷바라지라면 이골이 난 분이다. 양식이라도 충분하면 그래도 덜 고달프다. 곽 여사는 상하이 뒷골목 푸성귀 시장에 버려지는 배춧잎을 주어다 된장국을 끓여대었지만 나중에는 그조차 구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린다. 이은숙 여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날 오후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씨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하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 파는 것으로 이것은 가장 하층민이 먹는 것이지만 이것도 수가 좋아야 먹게 되는지라 살 수가 없었다. 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것으로 연명하니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때가 여러 번이었다.” -≪서간도시종기≫-

눈물 없이는 안사람들의 고생담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보살피고 뒷바라지한 것이기에 이들의 피나는 고생은 독립운동가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역사는 이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 여성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숱한 대학에서 역사 전공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만주벌판에서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며 독립투사로 뛸 수 있게 측면 지원한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편이다. 그나마 광복군 출신이거나 각종 애국단체에 이름 석 자라도 올라온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이나마 있지만 이은숙 여사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던 집안의 안사람에 대한 연구는 논문 한 편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부분에 많은 연구자가 나오길 고대한다.
             

<더보기>

전 세계에 유례없는 6형제의 독립운동
그 중 넷째 우당 이회영은 이은숙 여사의 남편
          
● 이회영(李會榮, 1867.3.17- 1932.11.17)

“동서 역사상에 나라가 망할 때 망명한 충신 의사가 비백비천(非百非千)이지만 우당 군과 같이 6형제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 거국한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는 일이다. 그 미거(美擧)를 두고 볼 때 우당은 이른바 유시형(有是兄)이요, 유시제(有是弟)로구나. 진실로 6명의 절의는 백세청풍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絶好) 모범이 되리라 믿는다.   -월남 이상재-

우당 이회영 선생은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선조때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다. 아호는 우당(友堂).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를 창립하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고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885년에 달성 서 씨와 결혼하였으나 상처하고 1908년 10월 20일 이은숙 여사와 상동 교회에서 재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동생인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여 귀국했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우당 선생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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