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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광복 63주년, 수원 어떻게 달라졌나
정부수립 60주년·광복 63주년, 수원 어떻게 달라졌나
  • 남경우 기자
  • 승인 2008.08.1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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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수원시로 승격, 63년 도청 이전… 농업도시서 인구 110만 IT산업도시로


올해 광복절을 맞아 건국 60주년이냐 정부수립 60주년이냐 등의 표현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역사인식의 차이로 지적되지만 어쨌든 남한 정부수립 후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 수원의 역사도 지금껏 이어졌다. 건국 60주년이라는 지금, 수원의 변천사를 되짚어봤다.

▲ 1950년대 팔달문 주변 모습과 2008년 현재의 모습.
● 광복 전후의 수원

일본강점기 막바지인 1944년 수원의 인구는 19만444명이었다. 일본강점기 일본인의 수원이민은 적은 편이었다. 서울과 인천이 가깝다는 실리상의 이유로 이주를 서두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1946년 수원의 인구는 20만6천784명이었다. 정부수립 1년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은 시로 승격했다. 수원군에 속해있던 많은 면들이 신설된 화성군으로 편입된 것도 이때다. 이로 인해 통계상 인구는 줄어들었다. 당시 수원시 인구는 7만4천명이었다. 동(洞)은 모두 27개 동으로 편성됐다.

● 6·25전쟁 그 후

6·25전쟁과 4.19혁명을 겪으면서도 수원시의 27개 동은 개편 없이 유지됐다.

6·25전쟁으로 전 국토는 초토 됐으며, 이는 수원도 마찬가지였다. 전란 중에 장안문과 창룡문이 파괴됐고, 수원에 자리 잡은 피난민들로 인해 도시구조가 변했다. 자료에 따르면 1951년 수원의 인구는 5만2천452명이었고, 이듬해에는 10만4천44명이었다. 북한에서 남하한 피난민들은 지역공터에 초막이나 판잣집을 지었다. 판잣집들은 주로 연무동에 있었던 구 공설운동장이나 세류동 언덕지대, 화성주변 등에 들어섰다.

1955년 수원의 상공업단체는 17개였다. 회원규모로는 수원영동시장번영회와 수원연초소매상조합이 각각 370명으로 가장 큰 단체였다. 이 당시 수원지역의 생산기업체는 섬유공업 20개사를 비롯한 44개사였다. 이 중 섬유공업의 종업원 수는 1천70명으로 제일 규모가 컸다.

● 경기도청 이전

1960년대 들어 수원의 인구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1960년 9만806명에서 1966년에는 16만1천1명으로 늘어나 9년간 7만여명이 증가했다.

1963년 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화성군 일왕면 13개 마을과 안용면 6개 마을, 태장면 3개 마을 등 20개 마을이 수원시로 편입됐다. 이로써 수원시는 47개 동으로 불어나게 되고 추후 18개 동으로 통폐합하게 된다.

특히 1963년 12월 10일은 수원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이 결정된 게 이때다. 도청이전이 결정되기 전까지 수원과 인천, 안양 사이에 치열한 유치경쟁이 펼쳐졌다. 표면적으로는 도내 제1의 도시였던 인천의 압승이 예상됐지만, 수원 출신 국회의원 이병희 씨를 비롯해 수원시장, 각 기관장, 유지 등이 망라된 ‘경기도청 수원유치추진위원회’의 강력한 의지를 담은 활동으로 수원으로 최종 결정됐다.

▲ 1910∼1967년까지 서울시 세종로에 있었던 옛 경기도청의 모형도.
 
● 본격화된 도시화

1970년대부터 수원의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 개통과 1969년 삼성전자의 수원 유치가 지역경제 활성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성전자 공장이 수원으로 오게 된 계기는 당시 이병희 의원과 이병철 회장의 유대관계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외 1975년 한일합섬과 1978년 선경화학㈜의 수원공장 설립, 가동도 70년대 지역발전의 기폭제였다. 이에 따라 인구도 1974년 21만258명으로 20만명을 넘어섰고, 1979년에는 29만272명으로 30만명에 육박했다.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인구가 증가하자 대학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973년 아주대학교의 전신인 아주공업초급대학이 설립됐다. 1977년 김우중 씨가 학교법인 대우학원을 설립해 이를 인수했으며,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경기대학교도 1979년 수원캠퍼스를 조성하고, 1984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 폭발적인 인구증가

1980년대 수원은 인구보다 가구 수에서 폭발적인 증가를 했다. 1980년 7만1천154가구에서 1989년 15만4천33가구를 기록했다. 10년 새 2배 이상인 8만2천879가구가 늘어난 것이다. 인구 역시 1980년 30만명을 넘어선 데 이어 10년 만인 1989년에는 2배가량 증가해 60만명을 넘어섰다.

1980년대는 우만동, 인계동, 권선동 등 동수원지구에 대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이뤄졌다. 뒤이어 1990년대에 영통지구에 대한 사업이 시작됐다. 1987년 수원시청마저 인계동으로 이전하면서 동수원지구는 수원의 새로운 중심지로 각광받게 된다. 오늘날 이들 지역은 아파트와 상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1988년 수원은 지방자치법에 의거 구제(區制)를 실시해 장안구와 권선구로 분구됐다. 1991년에는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여는 시의회가 30여년 만에 탄생했고 1993년 팔달구청이 개청됐다. 2003년에는 영통구가 설치됐다.

● 월드컵과 화성

화성은 1997년 12월1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차 총회에서 서울의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화성행궁이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1989년 지역의 원로 및 문화인들이 주축이 된 민간 조직인 화성행궁복원 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나서부터였다. 이어 같은 해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1993년 수원시가 나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화성행궁터에 세워졌던 수원의료원 건물과 구 수원경찰서, 구 여성회관 건물 등이 철거되는 등 복원공사가 착착 진행됐다.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기간에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는 미국-포르투칼 전을 포함해 총 네 경기가 열렸다. 수원이 월드컵 경기를 유치하기까지는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 수원이 유치 의사를 밝혔을 때 조직위원회는 물론 수원시민들조차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특히 시민 경기장내 1인 1의자 갖기 운동, 아름다운 화장실 가꾸기 운동 등이 호평을 받았다.

● 생명친화 도시로

수원시는 2008년 현재 121.1㎢ 면적에 4구 56개 법정동으로 행정구역을 갖췄다. 인구는 110만명에 육박하는 매머드급 도시다. 1950년대와 비교해 10배 이상 늘었다. 그 사이 수원은 농업기반도시에서 공업도시로, 다시 BT산업, IT산업도시로 변모해갔다.

수원의 역사에 정통한 이달호 수원시 학예연구사는 “과거 수원은 딸기밭이 유명한 서울 근교도시에 불과했지만 1963년 경기도청 이전으로 지역 수부도시로 발전하게 됐다”면서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지정도 도시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수원의 미래상에 대해 그는 “수원이란 도시명에는 물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제 수원은 올바른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생명 친화적 환경도시로 탈바꿈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