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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급제 그리고 백선달 2
무과 급제 그리고 백선달 2
  • 수원신문
  • 승인 2004.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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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협객 백동수 29] 과거에 응시하다

무과에는 실기 시험 외에 이론 시험이 있었다.

이론 시험은 세 가지였다.

유교 경전과 병서 그리고 법전을 시험관 앞에서 풀이해야 한다.

이를 강서라 했다.

유교 경전은 사서오경 중에서 하나, 병서는 무경칠서(육도, 손자, 오자, 사마법, 황석공 삼략, 위료자, 이위공문대) 중에서 하나, 그리고 <통감>.<역대병요>.<장감>.<박의>.<소학> 중에서 하나를 응시자가 선택하여 책을 보지 않고 풀이(이를 '배강'이라 한다)해야 한다.

   
▲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조선 정조대왕 때의 장용영 무사들의 24반무예를 널리 전파하고 있는 김영호씨가 지은 역사소설이다.
무경칠서 중에서 <오자서>는 제외했다.

이것은 1728년 무신란을 겪은 영조가 취한 일시적인 조처였다.

오기를 반란을 일으킨 정희량.이인좌와 같은 자로 보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법전(영조 당시에는 <속대전>을 앞에 펴놓고 읽으면서 뜻을 풀이(임문, 강석)해야 한다.

이것을 통, 조, fir 등으로 점수를 매기고 세 과목을 합산, 종합 점수를 내어 등락을 결정했다.

이처럼 무과는 실기가 많고 이론 시험도 무척 까다로웠다.

시험 과목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더 읽어야 할 책으로 <행군수지>가 있었다.

숙종 때 김석주가 편찬한 이책은 <병학지남>과 더불어 병가의 필독서였다.

역시 숙종때 이서가 편찬한 <화포식언해>도 읽어야 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총통에 화약을 장진하는 법, 총통의 길이에 따라 달라지는 약선 제조 방법, 화약에 드는 물자와 무게, 화약 제조법 등이 한글로 풀이되어 있다.

1770년 가을, 백동수는 사헌부의 감찰 아래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식년 초시에 응시했다.

식년시란 12간지에서 자.묘.오.유가 들어가는 해, 그러니까 3년마다 열리는 정규 시험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식년 전 해 가을, 서울의 훈련원과 팔도의 병영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문무관원의 감독 아래 초시를 치러 190명을 선발하되, 급제자수를 서울 일흔 명, 호서와 호남 각 스물다섯 명, 영남 서른 명, 관동.해서.관서.관북 각 열 명으로 할당했다.

인구 수를 감안하면 지방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셈이었다.

식년무과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스물여덟 명만 뽑는 규정을 지켰다.

응시자는 많은데 급제자 수가 적기 때문에 서울 출신들은 식년시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별시는 지방 출신이 참여하기 어려워 응시자는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한정되었다.

백동수는 이광섭과 함께 초시에 합격하여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한편 박지원도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했다.

이때 박지원은 영조의 특명으로 제출한 답안지를 왕 앞에서 낭독하는 영광을 안았다.

초시를 치른 뒤 백동수는 박지원을 만났다.

박지원은 더 이상 시험에 응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박지원에 생각을 돌이켜 회시(복시와 같음)에 응하라고 당부했고, 다른 친구들도 '임금의 은총을 입은 상태에서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회시에 응시하기를 강권했다.

백동수가 한창 복시를 준비하고 있던 11월10일, 이조 낭관을 지낸 최익남이 올린 상소가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그는 동궁이 사도세자 묘소에 오랫동안 성묘하지 않은 일은 잘못이라면서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나서야 할아버지에게도 효도를 하며, 아버지에게 정성을 바치고 나서야 할아버지에게도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 외척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리소서"라고 요구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탕평당이라 불리는 외척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지적한 최익남의 주장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최익남은 물론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이봉환과 남옥이 의금부에 붙잡혀 국문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봉환은 1748년 유후와 함께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바 있으며, 남옥도 1763년에 원중거, 김인겸, 성대중과 함께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의 활약으로 이봉환, 남옥, 성대중은 당대의 실권자 홍봉한의 추천으로 서얼로서 특채를 받아 벼슬에 올랐다.

다행히 성대중은 이 환란에서 비켜갔지만 하마터면 친한 벗을 잃을 뻔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백동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의 참화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이 무렵 백동수를 슬프게 한 일이 또 일어났다.

자신을 따라 활터에 다니며 무과를 준비하던 이한주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남산 활터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이한주는 잘못 날아온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예정된 복시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때 백동수의 마음을 뒤흔드는 일이 또 일어났다.

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 복시에 응시했던 박지원이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그냥 나와버린 것이다.

시험에 응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했었다.

횅동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박지원의 시험 거부에 백동수는 크게 상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