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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 조선 최고의 시전을 설치하라
화성에 조선 최고의 시전을 설치하라
  • 편집부
  • 승인 2012.01.0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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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시장 기획연재] '선비상인, 유상의 뿌리를 찾아서' ③

▲ 초가가 즐비한 팔달문 밖(1905년 이전, 수원박물관 소장)

1789년 7월, 15일. 정조시대 후반부를 여는 새로운 날이었다. 국왕 정조가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도호부 읍치로 이전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의 묘소를 천하명당으로 옮겨주었다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정조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신도시 건설의 신호탄이었다.

신도시 조성에 있어 가장 핵심인 것은 많은 백성들을 불러모아 대도회를 이루는 것이다. 대도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가 활성화되어 돈이 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업이 발달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조는 새로운 상업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수원에 한양의 육의전과 같은 시전을 설치하고 대부상(大富商)이 주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 체제공
정조의 의중을 알고 있는 체제공은 신읍치 설치 다음해인 1790(정조 14)에 신도시 번영책을 제안하였다. 수원부의 상업진흥을 위하여 전방(廛房)의 상설화와 함께 남·북 장시가 발달되고, 8도의 부호·부상들을 옮겨 살게 하여 8부가(富家)를 형성시키고, 정부지원과 민간자본의 유치를 통해 수원지역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경제행위를 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체제공의 건의와 더불어 비변사에서는 화성의 경제 육성을 위하여 서울의 부호 20호를 선발하여 중국과 무역하는 품목인 관모(官帽)와 인삼의 유통권을 수원에서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절목(오늘의 법)을 입안하였다. 상인들의 자본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영남 감영의 남창에 속한 5만냥과 평양 감영의 5만냥을 화성의 이주 상인들에게 지원하여 밑천을 삼도록 하였고, 이 상인들에게서 나오는 이자를 가지고 화성의 수리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모자와 삼이 주된 무역 품목이지만 만약 더욱 중요한 물품이 생기면 그것도 자연스럽게 무역의 품목에 넣어 마음대로 무역을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당시 수원으로 이주하여 상업행위를 하려는 이들이 대부분 한양의 상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의원과 역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의원들 역시 조선후기에 상업행위에 뛰어들었고, 역관들은 조선 무역의 중추였다. 이들이 자신들의 직분을 그대로 유지하며 수원에서의 상업행위를 할 수 있게 배려해준 것은 조선의 상업을 움직이는 서울의 대상(大商)을 유치하게 위한 판단이었다.

이와 같은 정조의 결정은 화성을 하루속히 대도회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은 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당시 한양의 부호들은 정조의 배려에 의해 서로 수원으로 내려오고자 신청을 하였다. 20호만이 내려올 수 있다고 하였는데 경쟁적으로 내려오고자 한 것이다. 모자와 인삼의 유통권을 독점시켜주고, 시전 설치 비용을 조정에서 대여해주겠다고 하는데 내려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도한 열기가 거꾸로 문제가 되었다. 정조가 신뢰하는 좌의정 이병모가 수원의 시전 설치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정리하여 정조에게 6가지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 하였다.  한양의 부유한 상인들이 수원으로 이주할 경우 한양의 경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나머지 이유는 대체로 수원 시전에 부상(富商)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장사를 하게 되면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기에 왕도정치에 위배가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특정 세력에게 독점권을 주면 일시적으로 많은 돈을 투자하여 상업을 흥하게 할 수 있지만 이는 백성을 모두 이롭게 하고자 하는 왕도정치의 근본 이념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병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불편한 6가지의 진실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병모의 의견에 우의정 채제공 역시 동의를 하였다. 비변사에서 제안한 화성 상업 육성법이 그대로 시행되어도 큰 문제가 없다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래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실제 존재하기에 철회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었다.

이에 화성유수 조심태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한양의 부상(富商)도 일부 받아들이지만 실제 수원의 상인들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수원에 거주하는 전체 백성들 중에 상업에 종사하고 싶은 이들에게 조정에서 총 6만냥을 지원하여 시전을 설치하고 장사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외부에서 대형 상인들이 온다고 하여도 수원 출신들이 함께 장사를 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집 한채가 20~30냥 정도였으니 6만냥을 정말 대단한 돈이었다. 이 절충의 의견을 정조가 받아들임에 따라 수원은 새로운 상인세력이 공존하게 되었다.

한양의 부상과 수원의 상인 그리고 전국 경향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특정의 독점권이 없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조선의 무역을 주름잡는 역관 상인들의 일부가 수원으로 와서 인삼과 모자를 유통하여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이 시장이 바로 조선 3대 시장인 화성 성내외 시장이었고, 오늘날 그 맥을 이은 성외 시장이 바로 팔달문 시장과 그와 함께 하는 남문 일대의 시장인 것이다.   

▲ 김준혁 박사
글=김준혁(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문학박사)
기획=(주)브랜드스토리, 팔달문상인회, 수원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