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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9.4.19 금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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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핏덩이 내동댕이친 왜놈에 굴하지 않던 “이애라”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1)

월선리 산마루에 드리운 붉은 저녁노을
충혼탑에 어리는 소나무 그림자가 길고 깁니다

어린 핏덩이 업고
삼일만세 뒷바라지하다
왜놈에 아기 빼앗겨 살해되고
차디찬 옥중에서 부르던 조국의 노래

식지 않은 그 열기
평양으로 원산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뛰어다니며
암흑의 조국에 빛으로 나투신 이여

어이타 스물일곱 그 아까운 나이에
왜놈의 모진 고문 끝내 못 이기고
생의 긴 실타래를 놓으셨나요

어이타 그 유해
그리던 고국으로 오지 못하고
구만리 이역
이름 모를 들판에서 잠들고 계시나요

오늘도 월선리 선영엔
십일월의 찬바람만 휑하니 지나갑니다.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이애라 애국지사 충국순의비에서

● 이애라 (李愛羅, 1894.1.7 - 1921.9.4)

이화학당을 졸업한 이애라 선생은 독립운동가인 이규갑(李奎甲)을 만나 스무 살에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와 평양 정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3년 동안이 이 부부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후 스무 다섯 살이던 1919년 전국적인 3․1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남편인 이규갑과 한남수․ 김사국․ 홍면희 등과 비밀 연락을 취하면서 1919년 ‘한성정부’로 알려진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 소집에 직접 관여한다. 또한, 독립운동의 열악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 1920년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모금운동을 했다.

이 당시 이애라 선생은 어린 딸을 업고 동분서주하였는데 서울 아현동에서 그만 일본경찰에 잡혔다. 이때 어린 딸을 낚아챈 왜놈들은 바닥에 딸을 내동댕이쳐 죽게 하고 이애라 선생은 잡아다가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한다. 출옥 뒤 여러 차례 겪은 고문 후유증 상태에서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천안 양대 여학교 교사로 취직했으나 사흘이 멀다 하고 형사들이 찾아와 남편을 찾아내라고 행패를 부리고, 걸핏하면 경찰서로 연행을 당하게 되자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시숙인 이규풍(李奎豊)이 거주하는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한다.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로 선생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경원선 열차로 원산으로 갔다가 배로 함경북도 웅기(雄基)항에 도착했으나 그만 배에서 내리자마자 왜놈에게 잡히고 만다. 당시 선생은 ‘요시찰’ 인물이었으므로 이미 총독부 경무국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웅기 경찰서에서 왜놈 순사들은 선생의 짐을 수색하고 독립운동가인 남편의 행방에 대해 추궁을 하는 등 모진 고문을 가하게 된다.
 
이미 국내에서 여러 차례의 고문과 오랫동안의 투옥생활로 몸이 망가진 선생을 두고 일본순사들은 선생이 옥중사망할 때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의사를 부르는데 이때 왕진 온 의사는 다름 아닌 큰 시숙 이규풍의 아들이었다. 선생은 의사인 조카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당시 남편인 이규갑 애국지사는 러시아에 창설한 한국 독립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일본 마적단과 교전을 하는 등 무장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잠시 남편을 만난 며칠 뒤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고문 후유증으로 꽃다운 나이인 스물일곱 살을 일기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충국순의비에 새겨진 현숙한 아내
                    
충남 아산에 있는 이애라 애국지사의 충혼탑을 찾아 나선 날은 11월 들어 첫 추위가 전국을 얼어붙게 한 날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까지는 확인이 되었지만 번지수까지는 아무리 해도 확인할 길이 없어 무작정 월선리로 달려갔다. 국내 일간지에 이애라 여사의 월산리 충혼탑 사진이 올라 있고 약도도 대강 나와 있었지만 그것만을 믿은 것은 실수였다. 이애라 애국지사의 남편인 이규갑 애국지사도 워낙 알려진 독립운동가인지라 근처에 가면 묘소를 안내하는 팻말이 있으려니 했는데 안내 팻말은 안보이고 ‘월선리’라고만 찍어 둔 길찾개(내비게이션)는 자꾸만 경로이탈을 알린다.

하는 수 없이 작은 마을로 들어 가보았지만 사람 하나 구경할 길이 없다. 간신히 마을 안쪽 집 마당에서 가을걷이를 하는 어르신을 만나 이규갑· 이애라 애국지사 무덤을 물으니 마을 입구의 이장을 찾아가 물어보란다. 아이쿠! 이장집은 또 어딘고? 물어물어 찾아간 이장님은 오리집 식당을 하는 분인데 방금 읍내로 나들이를 하셨단다. 아뿔사! 오리집 명함의 손말틀(휴대폰)로 전화를 하니 사모님 때문에 병원에 막 왔는데 다시 가서 안내해주겠다고 하더니 잰걸음에 달려오셨다. 오십쯤 되어 보이는 인심이 후덕해 보이는 이장님은 묘소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며 선뜻 안내를 하신다.

대부분 독립지사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안내해주는 분이 안 계시면 찾기가 어렵다. 묘소 입구에 작은 이정표만 몇 군데 세워주어도 찾아갈 수 있으련만 작은 배려가 없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 애국지사들이 모두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것은 아니다. 국가가 관리하는 곳에 안장되었다면 찾아가 뵙기도 쉽고 관리도 잘 될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마을 뒷산의 제법 경사진 길을 올랐다.

사람의 왕래가 있는 곳이 아니라서 무덤으로 오르는 좁은 산길의 풀을 베지 놓지 않았다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인데 다행히 잡풀은 사람이 다닐 만큼 깎아놓아 삐죽이 나온 가시나무를 헤치고 무덤에 오를 수 있었다. 야산 마루에 도착하니 푸른 하늘이 열려있었고 주변에는 소나무며 잡목들이 빙 둘러 아늑한 곳에 이애라 애국지사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무덤 여러 기가 있었다. 그 끝 한쪽에 이애라 여사의 이야기가 적힌 충혼탑이 오뚝하니 세워져 있다.

“… (선생은) 품성이 현숙 효순하여 범사에 관후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양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서기 1919년 3․1독립만세 때에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평양, 공주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후에 부군 리규갑 씨가 독립운동을 하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함경북도 승가항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하다”  -충국순의비(忠國殉義碑)비문 가운데-

충혼탑은 원래 마을 아래 입구에 있던 것을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서 이곳 무덤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이애라 애국지사는 이곳에 묻혀있지 않다.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로 왜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1921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숨진 뒤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 소재조차 알리는 기록이 국내에는 아직 없어 안타깝다. 멀리 이국땅에서도 고국을 그리며 한 송이 들꽃으로 피어있을 이애라 애국지사가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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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이애라 애국지사 충국순의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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